광주, 오월과 오월거리전

김병헌

 광주에서는 오월이 되면 시내 곳곳에서 5‧18민중항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많은 의미 있는 행사가 있지만, 미술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오월전’이다. ‘오월전’은 광주의 오월을 대표하는 미술전이자 가장 오래된 미술행사라 할 수 있다. 민족미술인협회 광주지회(이하, 광주민미협)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2020년부터 ‘오월전’과 ‘오월미술제’로 보다 확장되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 행사에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무엇보다도 최근 ‘오월전’에서 다시 등장한 전시인, ‘거리미술전’일 것이다. 
 거리미술의 의미를 실내 전시장을 벗어난 야외에서의 미술전시로 넓힌다면, 광주의 거리미술은 5‧18민중항쟁을 기점으로 본격화되는 1980년대 초반의 민중미술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거리미술은 집회나 시위 현장의 걸개그림이나 벽보 등으로서 군부독재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의 표현임과 동시에 저항의 수단이자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끈한 연대의 고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라는 개념이 첨가된 ‘거리미술전’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1991년 제3회 오월전부터라 할 수 있다.
 <오월에 본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제3회 오월전은 1988년 결성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이하, 광미공)에서 주관한 전시로서, 광미공에 따르면 “격론 끝에 전시장을 망월동 5‧18묘역 일대”의 야외전으로 결정했던 전시였다. 광미공은 이 전시에 대해 “냉전이후 미국의 새로운 역할을 그림으로 다루어 본 최초의 전시회”이며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중요하고 파격적인 전시회”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이 전시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이 전시는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것을 질문하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실내 전시장이 아닌 상징적인 야외공간을 (문제를 발언하는) 전시장소로 활용함으로써 기존에 갖고 있던 관습적인 하나의 틀을 깬 전시였던 것이다. 이처럼 1991년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 최초의 야외전인 ‘거리미술전’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만, 무자비한 공권력에 희생당한 강경대 열사와 이러한 살인‧폭력 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후 사망한 박승희 열사 사건 등은 광주전남지역대학미술패연합 광주미술선전대의 거리미술투쟁과 같은 수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1991년의 정국은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혼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2년에 열린 제4회 오월전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는 한 해 전의 전시와 비슷했지만 조금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전시였다. 인재미술관과 금남로 거리에서 행해진 이 전시 중 금남로 거리의 전시는 최초의 대규모 야외전으로서 광주의 중심 거리를 오고 가는 시민들에게 작품을 선보인 전시였기 때문이다. 이제 금남로 일대는 시민과 살아가는 생활의 공간이자 작품을 감상하는 전시장이 되었다. 이사범 당시 광미공 회장이 전시 도록에서 “「민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참된 아름다움의 형상화’」”를 언급하며 “이번의 전시회를 통해 오월의 정신적 유업을 이어 또다시 더 넓은 민중의 바다에서 민중삶의 강인함과 샘솟는 희망을, 절망과 재기의 모습을, 그리고 섧고 외로운 이들의 가슴을 형상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실어가겠습니다”고 말한 데서 이 전시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연말의 새로운 정권교체를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이 전시는 1980년 오월의 역사적 현장과 1992년 오월의 삶의 현장을 연결시킴으로써 전시의 제목처럼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2년에 이어 이듬해인 1993년의 제5회 오월전 역시 금남로 거리에서 개최되었다. <희망을 위하여>란 제목으로 진행된 전시는 금남로 거리에서의 두 번째 전시였다. 5‧18 13주기를 맞아 진행된 이 전시에서 광미공 작가들은 80년대 미술운동의 진원지였던 금남로 거리에서 사람살이의 참된 아름다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의 미술운동진영의 변모를 보며 그들은 “대중이 없이 이뤄지는 미술은 결국 한 시대의 호사취미를 만족시키는 치장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임을 경계하며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뜨거운 가슴의 광주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미술이기를 희망”한다는 말로 도록의 서문을 마무리 지었다. 따라서 전시 제목인 <희망을 위하여>는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어떤 희망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대중, 특히 광주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미술이 되는 것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희망의 무등을 넘어>란 제목의 제6회 오월전도 이전처럼 금남로 거리전으로 진행되었다. 1994년에 열린 이 전시와 이전의 전시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분모는 ‘희망’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금남로 카톨릭 센터 앞에서 펼쳐진 여섯 번째 오월전에 대해 광미공은 “5월 금남로 거리를 찾는 이 땅의 수많은 애국적 시민들에게 진정한 오월과 이 땅의 참다운 애국적 가치를 일깨우는 작품을 제작한다는 열의를 모아 개최된 전시회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듬해인 1995년에 개최된 오월전은 광미공의 오월전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도 흔치 않은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밀레니엄을 5년 앞두고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시작품의 훼손과 도난이 벌어졌던 제7회 오월전의 제목은 <오월특별법 제정촉구를 위한 35인의 가해자 얼굴>이었다. 1995년 8월 15일을 기해 5‧18 학살자들의 공소시효 만료를 눈앞에 둔 광미공은 학살주범들의 기소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통해 “과거의 규명없이 참다운 세계화는 있을 수 없으며 잘못된 역사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의 밑거름이요 우리들의 역사적 의무”임을 말하며 문민정부의 배려 속에서 학살자들이 보호되고 있는 현실을 규탄했다. 광미공은 “진정 올바른 해결은 단 하나, 우리가 15년 동안 줄기차게 외쳐왔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원칙”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0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금남로 2가에서 진행된 오월전에는 미국의 레이건(당시 미국 대통령),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 노태우(당시 수도경비사령관) 등 5·18 학살자들의 풍자화가 전시되어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예술을 통하여 이들을 영원한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금남로의 전시는 이듬해인 1996년 5월 망월묘역에서의 야외 상설전시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5년의 이 전시는 현장에서 작품이 훼손·강탈당함으로써 강제로 종료되었다.
 1995년은 광주미술계 안팍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특히 광주비엔날레라는 국제 전시의 개최는 큰 기대만큼이나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광주시의 졸속적인 행태에 반발하여 등장한 <안티비엔날레-광주통일미술제>는 미술계를 넘어 세간의 관심을 이끌었다. 관 주도의 광주비엔날레와 달리 순수 민간에 의해 열린 미술제는 광주 정신이 없는 철학의 부재, 화합이 아니 야합, 일치가 아닌 분열, 열정이 아닌 야망 등 미술계의 고질적인 병폐에 반대하여 망월동 5·18 묘역 일대의 야외에서 <역사는 산을 넘어 강물로 흐르고>라는 제목으로 1995년 9월 21일부터 10월 5일까지 개최되었으며, 이후 연장전시까지 하게 되었다.

 한편 1995년 12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제정된 5·18 특별법으로 5·18의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에 대한 기소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국가권력의 비상식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흐름 안에서 1996년 5월 <우리 하늘, 우리 땅>展이라는 여덟 번째 오월전이 진행되었다. 이 전시의 도록에서 광미공은 “5월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제정된 후 5월의 학살자들이 재판대에 올라 사법적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 가는 듯”하지만 “아직도 이땅에는 모든 일들이 풀리지 않는 답답함으로 진정 아름다운 오월은 멀기만 합니다.”고 말하고 있다. 금남로 2가 구)동구청 앞과 구)광주은행 본점까지의 거리에서 펼쳐진 작품들은 전시 제목처럼 오월과 관련된 작품부터 통일관련 작품을 포함하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땅과 하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식물, 동물, 흙과 돌, 집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하늘과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시였다.
 1997년의 제9회 오월전 <만인의 얼굴-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展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몇몇 투사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모든 민중의 것임을 보다 분명하게 표명하는 전시였다.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금남로 거리에서 ‘만인보’ 형식의 퀼트작품으로 펼쳐진 <만인의 얼굴>전은 “역사의 뒤안에 숨어서 이 땅을 조용히 지켜” 온 우리의 부모형제나 친구, 이웃 등 낯익은,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1997년 8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는 95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제2회 <광주통일미술제-광주의 눈>이 ‘화엄광주’라는 주제와 ‘자연, 역사, 인간’이라는 소주제로 5·18 망월묘역에서 광주비엔날레 특별기념전으로 개최되었다. 이 기념전은 역사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잇는 ‘굴다리 조형물’로부터 여러 상징적 아이콘으로 삶과 역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10리길의 이야기’, 시민과 학생, 작가가 참여한 ‘만인의 얼굴과 역사’, 대형 그림으로 나타나는 ‘남녁의 꿈’, 5‧18 묘역으로 가는 길 중간의 저수지에 설치된 ‘물의 노래’,  5‧18 묘역 앞의 ‘만장, 장승, 솟대’, 마지막으로 주 전시장의 ‘광주로 가는 길’ 사진전, ‘민들레, 그 바람꽃’ 슬라이드 쇼, 그리고 특별전시인 ‘여성미술전’, ‘해외작가 팩스미술전’, ‘시민사진전’으로 구성되어 오월정신을 확인하고 미술문화의 새로운 모색과 민주 성지 및 예향 광주의 정체성을 제시하였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정부수립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 후 열린 제9회 오월전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금남로 거리에서 열린 이 전시는 정권교체라는 의미 있는 변화가 있기까지 약 18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이것조차 오월 당시 평범했던 광주시민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말해줬던 전시라 할 수 있다.
 새천년을 한 해 앞둔 1999년은 세계적인 세기말적 현상들이 있었던 해이자 불안, 기대, 희망과 절망 등 온갖 모순적인 상황이 공존했던 해이기도 했다. 1999년 5월 14일부터 19일까지 금남로 일대에서 개최된 제11회 오월전 <IMF>展은 1997년 12월 국가부도 위기 사태로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통해 국가부도를 모면한 대한민국의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고발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전시였다. IMF 이후 1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의 오월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은 기업들의 줄도산과 대량 해고, 치솟는 실업률 등 온갖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 전시는 이처럼 “거듭되는 대형 재난사고와 부정비리관행 등 군사독재 속 독점경제체제의 처리되지 않은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터져버린 우리의 상처 그대로

이후 1999년 <IMF>展을 끝으로 광미공의 거리미술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000년부터 진행된 오월전의 큰 흐름은 야외 거리미술전보다는 실내 전시 위주로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2002년 2월 27일 광미공은 “21세기의 새 문화적 지형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해 갈 수 있는 미술인들 특유의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변화를 낳게 할 조직적 판단”의 필요에 의해 “보다 멀고 긴 싸움을 위해(내부의 다양한 경향이 자유롭게 구현되도록) 스스로 묵은 둥지를 허무는 강한 입장을 선택”한다며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1988년 10월 28일 결성된 광미공은 14년여 만에 해체되었으며 일부는 광주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광주민예총) 미술분과에 들어가 그 명백을 이어가게 된다.
 2002년 제14회 오월전부터는 광주민예총 미술위원회에서 주관하게 되었으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실내전시로 진행되었다. 비록 오월전에서의 거리미술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야외에서의 모든 그림 활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망월묘역 일대에서 독립된 사업형식으로 진행된 만장‧걸개 그림 등의 야외 설치전이나 2005년, 2006년 사)광주민예총과 미술인연대가 지방문예회관 특별공연프로그램 개발지원사업으로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게릴라아트버스-마을벽화그리기> 등은 여전히 거리미술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개최된 2006년 제18회 오월전 <광주, 한반도 ing...-지점과 지향>展은 실내와 야외 둘 모두에서 동시에 진행된 예외적인 전시였다. 구)전남도청 본관 1층 전시실에서는 조각과 설치미술이, 시민광장(현, 5‧18민주광장)에서의 전시는 창평중학교 학생들이 하나씩 그린 그림을 이어붙여 만들어진 걸개그림 형식의 공동작품이 구)전남도청 정문 벽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2006년 10. 26일 박철우를 초대 회장으로 광주민미협이 창립되어 창립기념전을 열고 광미공의 오월전을 계승하게 된다. 2007년 제19회 오월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광주민미협의 오월전은 언제나 그 시대에서 요구하는 정신과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광미공 때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2019년 10월에는 광주민예총의 주관으로 광주민족예술제-광주아리랑이 개최되었는데, 그 가운데 <민중미술 미디어파사드>는 구)전남도청 본관 외벽에 34명의 민중미술화가들의 작품이 투사되는 미디어아트 형식을 통해 거리미술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또한 광주민미협은 2020년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의 미술인 협회나 미술관, 독립예술공간 등이 함께 참여하여 오월미술제를 개최함으로써 광주 도처에서 각각 독립된 형태로 진행되던 오월미술전시회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같은 해 5월에는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의 얼굴을 풍자화로 만든 전시, <놈놈놈 얼굴>展이 금남로 거리에서 개최되었다. 광주민미협 회원을 대상으로 한 조갑제, 변희재, 주옥순 등 대표적인 왜곡‧폄훼‧망언자 18명의 얼굴 풍자화를 그릴 작가 모집은 공지 한 시간 만에 마감되었으며, 이 전시는 시민들은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었다.
 90년대 광미공 시절을 연상케 했던 광주민미협 주관의 2020년 금남로 거리의 <놈놈놈 얼굴>展에 이어 2021년 5‧18민주광장에서는 오월광장미술전이 펼쳐졌다. 이 광장미술전은 2021년 오월미술제에 함께하는 8개 연대전시 기획자들의 추천작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숫자 5, 1, 8을 형상화한 구조물에 각 연대전시 장소에 걸린 작품의 복제품들을 설치함으로써 8개의 장소의 대표작을 한 자리에서 미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별개로 2021년 3월부터 광주전남작가회의는 ‘민주화 항쟁 지지와 연대를 위한 릴레이 시 운동’을 전개하고, 생명평화 미술행동은 미얀마 군부세력에 맞서 시위에 나선 미얀마인들을 위한 전시를, 광주민미협은 옛 전남도청 광장에서 미얀마 민주화 황쟁 현장 사진을 선보여 미얀마미주화 항쟁에 대한 동참과 지지를 위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2022년 오월미술제 중 한 꼭지라 할 수 있는 광주민미협 주관의 <호명呼名 5‧18거리미술전>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1990년대 오월이면 금남로 거리 일대에서 매년 볼 수 있었던 그때의 거리미술전을 떠올리게 한다. “2022년 오늘 다시 5‧18거리미술전을 호명呼名하는 것은 현 시대와 유기적으로 살아 숨 쉬는 현장으로서의 오월정신을 실현하려는 미술인들의 간절한 실천적 행동”이라는 기획자의 말처럼, 코로나19와 기후위기 등으로 인한 급격한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여 폭력과 차별 등 온갖 사회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1990년대와 같은 시민들과 함께 공동체 정신과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거리미술전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시대적 요구라 할 것이다.